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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과 미술] 6. 1900년대 근대 기업의 성장과 디자인 (2)

2. 기업을 위한 디자인 - CI디자인 : 1900년대 독일제국의 산업발전을 상징하는 대기업은 베를린 전기 카르텔 회사(AEG)였다. AEG는 대형 발전소의 터빈에서부터 가정제품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종류의 제품을 생산했던 회사로서 1906년부터 1907년 사이의 기업 총가동율이 20% 이상 성장했을 정도로 거대한 기업으로 발전했으며 해외 수출도 크게 신장되었다. 따라서 제품과 광고, 제품의 전시 등에서 각각 그 기능을 확대하려는 의식이 고조되었다. 제품의 판매면에서 유행과 취행에 맞는 미적 이미지를 고려하는 필요성이 생기게 되어 AEG늬 건믈, 사무실 등은 건축가에게, 카탈로그, 포스터, 광고 등은 미술가에게 의뢰하였다. AEG가 디자인 역사 가운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이미 이때부터 기업 이미지의 통일을 위한 CI프로그램을 도입한 훌륭한 선례를 남겼디 때문이다. 오늘날 CI 츠로그램은 시각전달 디자인 분야에서 좋은 기업 이미지 만들기를 위한 디자인으로 이해되고 실행되는 경우가 많지만 AEG의 CI프로그램은 회사의 건물, 노동자 주택, 공장, 생산제품, 카탈로그, 서식류, 제품 전시에 이르기까지 기업의 모든 활동과 실체를 시각적으로 통일하여 표현하는 CI프로그램이었다. 이것은 AEG의 최고 경영자의 경영철학에서 비롯되었는데, 창업주 에밀 라데나우의 아들 윌터 라데나우는 근대기어븡 ㅣ모든 시각적 스타일은 일관되게 통일될 필요가 있으며, 그것은 오직 디자인에 의해서만 달성될 수 있다고 믿고 1907년 유명한 건축가 겸 디자이너였던 페터 베렌스를 상임고문으로 채용하였던 것이다. 페터 베렌스와 그의 동료들, 예를 들면 미스 반 데어 로에, 그로피우스 등으로 구성된 디자인 팀은 AEG의 건물, 제품, 그래픽 디자인 등 모든 것의 시각적 요소를 관장하고, 통일시켜 이때부터 수년 동안 훌륭한 결과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이 회사의 경영진의 생각, 이른바 굿 디자인이 판매르 증디시킨다는 믿음과 세계시장에서 다른 제품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기로서 제품의 스타일을 중요하게 인식했기 때문이다. 페터 베렌스는 장식적인 것보다 풀륭한 비례를 강조했으며, 비록 장식이 필요하다고 해도 개인적인 취향의 장식이 되어서는 안되며, 오히려 기하학적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의 독일의 문화개혁자들 가운데에는 열렬한 개성주의 예술가들이 있어 작실을 배제한 기하학적 형태의 조형적 특성을 강조하는 디자인은 크게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AEG의 CI디자인은 오늘날 CI프로그램의 효시로서 런던 교통공사, IBM, 제너럴 일렉트릭 회사 등 오늘날 대표적인 CI디자인의 성공에 좋은 본보기가 되었다.

 

3. 대량생산과 디자인 : 포드의 처음 직장은 미시간 자동차 회사였는데, 그는 처음부터 자동차를 대량생산하는 데에 관심을 가졌다. 1896년 그는 그의 최초의 4륜 자전거를 판매하기 시작한 다음부터 "유행에 인색한 자동차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고, 대규모 생산을 탐색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라며 1903년 포드 자동차회사를 설립했다. 포드는 자동차를 만드는 방법은 하나의 핀이 핀 공장에서 생산되어나올 때에 모두 똑같이 만들어지듯이 자동차도 자동차 생산공장에서 모두 똑같이 생산되어야 한다는 신념이었다. 1908년 포드는 기존의 모델 A포드 자동차 대신에 새로운 모델 T 4기통 20마력 포그 자동차를 개발하여 자동차의 대량판매시작 형성에 크게 성공하였는데 이것은 아마 자동차 역사상 하나의 신화였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하여 푸드 자동차으 ㅣ대량생산 덕택에 보통의 샐러리맨까지도 자동차를 구입할 수 있는 자동차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포드가 생각한 미적 쵸준화는 대량생산에서 요구되며, 표준화 및 기능적인 제품이 널리 받아들여지도록 대량 취미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었다. 그 결과 검정 빛깔의 포드 모델 T는 거의 2-년 동안 시각적으로 한결같은 형식으로 존속하였다. 

 

4. 생산을 위한 디자인 - 표준형태 : 독일 베르크분트는 미술가들과 산업 분야의 생산자들이 협력하여 독일의 미술과 공예를 개혁가기 위한 일종의 디자인 진흥기관으로 1907년 뮌헨에서 미술가, 공업계와 실업계를 포함한 산업인 긔고 예술 애호가 등 100여명의 유명인사들이 모여 경성한 독일공작협회이다. 실질적인 설립의 계기와 추진은 헤르만 무테지우스에 의해 이루어졌으나, 많은 관련 분야 지도자들이 창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였다. 1903년 독일로 돌아온 무테지우스는 영국의 건축, 공예, 산업 디자인의 진보와 영국의들이 성취하였던 이 분야의 좋은 장점들, 이른바 버나큘러 제품이 갖고 있는 직접적이고 정직한 재료의 사용, 교묘하고 순수한 공업 생산공정 등이 독일의 상황에서도 적용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보고서를 정부에 정기적으로 제출하였다. 독일 베르크분트는 분명히 독일의 특성에 그 바탕을 둔 독특한 디자인 운동이지만 그 영향의 근원은 외국으로부터 비롯되었던 것이다. 베르크분크는 영국의 미술/공예운동처럼 낭만주의적 수공예롤 되돌아가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고 당시 독일의 장식미술 분야의 공예가와 디자이너들 가운데 팽배해 있던 보헤미낭적인 개성주의 심미주의적 성향까지 거부함으로써 독일의 공작노동의 질적 수준을 향상시키는 데에 크게 기여하였다. 독이 베르크분트는 미술, 공예, 공업, 상업 분야에서 최고의 지례를 결집하여 산업생산 제품의 질적 수준을 높이려고 노력한 결과 독일의 공업생산품의 디자인은 간결하고, 검소하며, 장식없는 표면, 순수한 색채의 특징을 가진 합리전인 양식을 성취하였던 것이다. 일반대중의 생활의 질적 향상에 영향을 주었고 그래서 독일의 얼굴을 변형시키기까지 하였다. 독일 베르크분트가 설립되는 데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했고 설립자로 알려지고 있는 세 사람은 헤르만 무테지우스, 앙리 반 데 벨데, 프리드리히 나우만이었는데 각각은 그 출신, 전공의 배경이 건축가 겸 행정가, 미술가 겸 공예가, 정치인이었기 때문에 독일 베르크분트의 근본적인 목적에 대한 이들의 의견은 일치하였으나, 조직과 정책면에서는 서로 너무나 다른 뚜렷한 견해를 가지고 있어 출발 때부터 내분의 징조를 안고 있었다. 이와 같은 내분과 이념 논쟁에도 불구하고 1934년 독일 베르크분트가 없어지기 전까지 27년 동안 독일의 디자인 발전 뿐만 아니라 세계 디자인 역사 가운데에서 모더니즘 디자인 운동이 성공하는 근본 바탕을 마련하였다. 독일 베르크분트는 오늘날 우리들이 현대 디자인이라고 정의하고 있는 산업 디자인의 보현적인 조형적 특성, 이른바 기능적이고 구조적이며 기하학적이고, 순수하면서도, 추상적인 디자인을 성취함으로써, 미술과 사업을 밀접하게 결합하는 독일 디자인의 목적을 잘 실천하였으며, 자본주의 사회에 있어서 미술가의 역할을 재정립하였던 것이다.

 

출처 : 미진사-산업디자인150년